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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심리학자

무의식과 욕망 지그문트 프로이트

by 벨메리 2022.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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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프로이트 Sigmund Freud(1856~1939)는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이자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이다. 프로이트는 무의식과 억압의 방어기제에 대한 이론, 그리고 환자와 정신 분석자의 대화를 통하여 정신병리를 치료하는 정신분석학적 임상 치료방식을 창안한 것으로 매우 유명하다. 또한 그는 성욕을 인간의 생활에서 가장 주요한 동기 부여의 에너지로 정의하였으며, 치료 관계에서 감정의 전의 이론, 그리고 꿈을 통해 '무의식적 욕구'를 관철하는 등 치료 기법으로도 알려져 있다. 뇌성마비를 연구한 초기 신경병 학자이기도 하였다. 신프로이트주의에서 프로이트의 많은 이론을 버리거나 수정하였다. 프로이트의 방법과 개념은 임상 정신 역학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생각은 인문 과학과 일부 사회 과학에 계속 영향을 주고 있다.

 

전기

프로이트는 1856년 5월 6일 오스트리아 모라비아 지방의 프라이 베르크에서 직물상을 하는 유대인인 아버지 야곱 프로이트와 어머니 아말리에 나타우젠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 시대의 대부분의 남성들이 그러했듯이 프로이트의 부친도 가부장적 권위가 몸에 밴 사람이었으며, 이런 부친에게 프로이트는 매우 강한 적개심이 있었다고 한다. 프로이트의 모친은 부친보다 약 20세 연하로 아주 많은 연령 차이가 났으며 이런 어머니에 대해서 강한 성적인 감정을 느꼈을 것이라고 전해진다. 빅토리아 문화권이었던 당시 시대적인 배경을 생각하면 왜 프로이트가 성욕을 인간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동기부여의 요소라고 생각하였는지 알 수 있는데 빅토리아 문화권은 성을 아주 금기시 여기고 터부시 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법을 공부하기로 했다가 빈 대학교의 의과 대학에 입학하여 다윈주의자였던 카를 클라우스 교수 밑에서 공부하였다. 그가 의대를 택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인 다윈의 '종의 기원'과 괴테의 '자연'에 대한 독서 때문이었고 파리 살페트리에르 병원장 샤르코 밑에서 장학생으로 약 5개월간 연구하면서 히스테리와 최면술에 특히 관심을 가졌는데, 이것은 장차 정신분석학을 창안하는데 아주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프로이트와 정신분석

프로이트의 나이 40대에 그는 수많은 심신증 장애와 더불어 죽음에 대한 지나친 공포, 그 외의 공포증에도 시달렸다. 이시기에 그는 자신의 꿈, 기억 그리고 본인의 인격발달의 변천에 대해 탐색하는데 몰두하였다. 이렇게 자신을 분석하면서 프로이트는 1896에 죽은 자신의 아버지인 야콥 프로이티에 대해 적대감을 느꼈으며 어린 시절 매력적이고 따뜻하며 포근했던 어머니 아말리아 프로이트에게 느낀 성적인 감정을 상기하였다. 자기 분석을 계속하여 지금까지 수집한 자료들을 모아서 1899년 11월, 라이프치히와 비엔나에서 동시에 '꿈의 해석'을 출판했다. 그리고 정신학 분석을 연구하여 빈 정신 분석 학회를 조직했다. 1900년과 1902년에 책을 출간한 이후 프로이트 이론에 대한 관심은 점차 증가하였고, 지지자 집단도 생겨났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자신의 이론을 비평하는 지지자들과 충돌하기도 하였는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원래 프로이트의 생각을 지지했던 카를 융이었다. 두 사람이 결별한 이유는 융이 종교와 신비주의에 흥미를 가지고 다룬 탓도 있는데 프로이트는 이를 비과학적이라고 보았다.

 

프로이트의 심리학

무의식과 꿈의 분석학

프로이트는 무의식이 행동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대중화한 심리학자로 정신분석학회의 창시자이다. 이러한 무의식적 갈등이 정서적으로 영향을 준다는 프로이트의 이론은 이후 자연스럽게 정신질환을 이해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한편 그는 최면과 최면이 어떻게 신경증 치료에 도움을 주는지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후에 현재 '대화 치료'로서 발전하여 알려져 있는 자유 연상과 꿈의 해석에 대해 이를 지지하며 최면술을 포기하였다. 이들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핵심 요소가 되었다. 프로이트는 특히 당시에 히스테리라고 불리던 것에 관심을 가졌는데 이는 현재 전환 신드롬이라고 불리고 있다. 프로이트의 이론들과 환자에 대한 그의 치료는 19세기에 비엔나에서 논쟁이 되고 여전히 오늘날에도 논란이 되고 있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그것들을 과학적 의학적 논문으로서 계속 논의되는 것뿐 아니라 문학, 철학, 일반 문화에서 종종 논의되고 분석되어 왔다.

자유 연상(심리 역동 이론)은 심리학에 사용되는 기술로서 프로이트에 의해 처음 내세워졌다. 프로이트는 최면술이 틀리기 쉽고 의식이 있는 동안에 중요한 기억에 대하여 환자들이 회복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최면술로 치료하기를 그만두었다. 자유 연상 기법을 통해 프로이트는 명백하게 중요하지 않거나 잠재적으로 환자를 압박할 수 있는 혼란스러운 기억일지라도 관계없이 환자들에게 무엇이든 말하도록 했다. 이 기법은 모든 기억은 단일 연합의 네트워크에 정렬되어 있고 당장이든 후일이든 그것은 중요한 기억과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불행하게도 프로이트는 기억해내는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장 고통스럽고 중요한 기억이 환자에게 저항을 일으킨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결국 일정한 기억들이 철저하게 억압되어 있다가 정의 의식 영역으로 뚫고 올라올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프로이트의 궁극적인 정신분석학적 치료는 그것들을 정신 깊숙이 묻어버리는 내부적인 정신 갈등으로서의 이러한 기억들의 회상에 과도하게 초점을 맞추지 않았으며, 자유 연상 기법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정신에 관한 연구에서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프로이트에 대한 비판

과학철학자 칼 포퍼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반대되는 근거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과학일 수 없다고 보았다. 아돌프 그륀바움은 정신분석학은 반증가능하며, 사실상 틀렸음이 증명되었다고 주장했다. 비판자들과 옹호자들 간의 논쟁은 때때로 매우 격렬 해져서, 이러한 논쟁들은 프로이트 전쟁으로 보였다. 한 편 알프레트 아들러 나 카를 융 같은 경우에는 프로이트 와는 다른 관점에서 무의식의 개념을 다룬 바 있다. 또한 행동주의 심리학의 초기에는 정신분석학이 클라이언트에 대한 심리적 접근에서 절대적으로 보다 효과적일 수 있는 근거는 찾을 수 없었다는 맥락의 보고를 한 바 있다. 그러나 많은 심리학자들은 프로이트가 개척한 인간의 무의식 영역과 본능에 대한 깊은 이해의 결과물들이 논리적이지 않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는 데에도 동의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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