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무의식 기억과 꿈 그리고 사상 카를 융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hg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hg 1875년 7월 26일~1961년 6월 6일)은 스위스의 정신의학자로 분석심리학의 새로운 영역을 연 사람이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지 않고 바젤대학교와 취리히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해 정신과 의사가 되었다. 부르크 휠츨리 정신병원에서 일하면서 병원의 원장이었던 오이겐 블로일러의 연구를 응용해 심리학 연구를 시작하였으며 이전 연구자들이 시작한 연상 검사를 응용하면서 자극어에 대한 단어 연상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연상은 성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당시 학계에서 자주 금기시되고는 하였다. 그는 특정한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지금은 유명해진 '콤플렉스'라는 단어를 사용해 이에 관련된 학설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또한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함께 정신분석학 연구를 하기도 했지만 프로이트의 성욕 중심설 말고도 아프 레트 아들러의 사회심리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1913년을 전후하여 독자적으로 이들의 양립에 관한 연구로 분석 심리학설을 작업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내면에는 의식과 무의식의 층이 있다고 생각함과 더불어 개체로 하여금 내면의 무의식들이 통일된 전체를 실현하게 하는 자기 원형이 초월적 기능(transcendental fuction)이 있음을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심리치료법을 개발하여 이론화하였고 심리치료를 받는 사람들에게 '개체화' 또는 자기실현이라고 하는 자신의 신화를 추구하는 과정을 통해 좀 더 인격체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1914년 사임하기까지 국제 정신분석학회 회장을 역임한 바 있으며 취리히 연방공과대학교의 심리학 교수 바젤 대학교의 의학 심리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융의 심리학
융은 한 개인의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집단 무의식이 대립구도를 이루면서 이러한 대립 속에서 끊임없이 조화를 이루어 역동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리고 이러한 심리학적 연구가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한편 이러한 맥락에서 융은 인간이 겪는 괴로움과 고통이 심리적 사회적 성숙으로 이어지는 긍정적인 결과로써 삶에 대한 겸손을 주요하게 언급한 바 있다.
융 심리학의 기본개념
연상 실험과 콤플렉스 개념
언어 영상 실험 초기의 융의 연구 속에서 가장 대표적이고 심층심리학의 연구자로서 세상에 두루 알리게 된 것은, 1904년에 발간된 '연상 실험'에 관한 논문이었다. 언어의 연상에 의해 무의식의 내용을 의식화해서 이해하는 시도는 프로이트의 자유 연상에 이미 볼 수 있지만, 융은 일련의 극히 간단한 단어를 준비한 다음 실험의 대상이 되는 사람에게 연상받아 응답에 걸리는 시간을 측정,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체크하고 평균적인 응답과 특수한 응답의 차이를 부조로 했다. 융은 후자의 반응을 무의식의 콤플렉스와 관련지었지만 연상 실험은 단어나 시간의 측정 수치, 재현성의 유무라는 구체적인 데이터가 제시되었고 통계적인 비교가 이루어져 객관적으로 과학적인 가치를 가졌다. 콤플렉스의 개념 응답의 시간의 차이가 생기거나 부드러운 재생을 볼 수 없는 자극어를 상세하게 조사해 갈 때 융은 자극어가, 피실험자 자신에게도 의식되지 않은 무엇인가 감정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을 찾아내었다. 면밀한 연구 뒤에 융은 피실험자의 마음에는 의식되지 않은 감정과 관념의 복합체가 존재해, 이 복합체에 서로 부딪히거나 모순되는 자극 어가 제시되었을 때 응답의 시간의 차이가 생기는 것을 확인했다. 융은 이러한 무의식에 있는 관념과 감정의 복합체를 콤플렉스라고 지칭했다. 분석심리학은 다르게 콤플렉스 심리학이라고도 부르지만, 그것은 콤플렉스 개념이 융의 분석심리학의 기본이 되기 때문이다. 무의식의 연구와 프로이트와의 교류 연상 실험의 연구를 통해서 프로이트에게서 독립을 할 수 있었다. 무의식의 힘동구조를 찾아낸 융은, 무의식의 동역학 구조를 이용해 정신분열병의 치료가 가능하지 않은가 라는 기대를 안았지만 무의식의 심리현상에 대해서는 미지의 부분이 너무 많아 융이 배운 정통적인 독일의 정신의학에는 무의식에 대한 연구자료가 너무나 부족했다. 그러나 재야의 심리요법 집으로 불리던 사람들 속에 무의식의 심리현상을 잘 아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당시에는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심리학과 심리요법 이론에 명성을 계속 쌓고 있었기에 융은 프로이트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편, 연상 실험의 연구로 벌써 무의식의 연구가로서의 지위를 얻던 융과 친밀감을 쌓는 것은 프로이트 에게도 매우 의미와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또, 당시의 독일 스위스의 정신의학계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평가하고 정신분석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승인한 사람이 오이겐 브로일러라는 것도 중요했다. 융은 취리히 대학 정신과의 교수였으며 정신분석으로의 융의 접근은 브로일러가 융에게 기대했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융은 프로이트에게 정신분석을 배워, 프로이트가 가지고 있던 무의식 중에 붙은 풍부한 지식과 견문을 배움과 동시에 무의식의 구조나 그 역동에 대해서 철저한 논의를 주고받았다. 후에 융은 자전에 기록하고 있지만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해에는 한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프로이트의 제자와 추종자, 공동 연구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융의 주제인, 조현병의 역동을, 프로이트의 이론에서는 해독할 수 없었고 치료법의 지침도 또 제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목표 상실과 새로운 이론의 구성
융은 자기의 내면과 마주 보기 위해서 취리히 대학 강사의 일자리를 물러났고 1913년 프로이트의 리비도의 정의를 확대시킨 자신의 심리학을 '분석심리학'으로서 발표함과 동시에 프로이트 및 그 학파와 결별했다. 이것을 가지고 그의 정신의 파국이라고 보고 융이 이 시기 정신 분열병에 빠졌다는 견해도 있는 반면 이 시기를 그의 '창조의 병'시기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사실, 융은 더욱더 불굴의 의지로 연구를 계속해 일견 무관계하게 생각되던 것이, 실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나, 여러 가지 무의식의 기능을 찾아낸다. 융은 프로이트와의 결별 이후엔, 정신 분석적 수법과는 다른 치료법을 강구했다. 처음에는 방향성을 찾지 못해 헤매었지만, 환자와 계속 마주 봐 이윽고 환자의 무의식의 흐름에 맡기는 것에, 치료적 의의를 찾아냈다. 1920년 프로이트와의 결별 7년 후, 융은 45세에 '심리학적 유형'을 발간해, 자신의 독자적인 심층심리학 이론을 발표한다.